고려시대의 왕릉은 고려조의 도성이었던 개성 부근에 주로 있으며, 고려 고분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 밖의 각지에 산재하고 있다.
고려의 왕릉은 일반적으로 구산(邱山)의 언덕 아래쪽의 남향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동쪽)에 청룡, 우(서쪽)에 백호를 이루는 언덕이 있고, 후방에 주산(主山)이 있고, 백호는 능의 앞쪽으로 우회하며, 주산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은 능 우측의 개천에서 시작해서 능 앞을 흐르면서 능이 속한 혈판의 토질을 단단하게 해주므로 명당이 꽤 있다.
고려 시대는 장례문화에서도 사찰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불교적인 의례와 유교적인 절차가 경우에 따라서 혼합이 되어 있다. 묏자리를 잡는 데는 음택 풍수가 성행했지만, 매장뿐 아니라 화장과 풍장(시체를 지상에 노출시켜 자연히 소멸시키는 장례법) 등의 전통도 이어졌다. 조선 시대 장례문화는 초기와 중기에는 유교적인 장례문화가 정착되고, 불교의 장법인 화장이 금지되며, 후기에는 묘비의 사용이 크게 확산되면서 문중 단위의 집단 묘지가 성행했으며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명당자리를 놓고 다투는 산송(山訟·묘지를 쓴 일로 생기는 송사)이 빈발했다. 조선 시대 장례에서 고인이 마지막으로 입고 가던 옷, 즉 수의는 생전에 입던 옷 가운데에서 좋은 것을 골라 입혀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